맨위로가기

만지케르트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만지케르트 전투는 1071년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이다. 비잔티움 제국은 군사적 무능과 셀주크 제국의 아르메니아 침략으로 인해 이 전투를 치르게 되었고, 로마누스 4세가 이끄는 비잔티움 군은 알프 아르슬란의 셀주크 군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은 아나톨리아를 상실하고 정치적 혼란에 빠졌으며,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 전투의 패배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멸망에 이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만지케르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만지케르트 전투
부분전동로마-셀주크 전쟁
15세기 프랑스 삽화, 당시 서유럽 갑옷을 입은 전투 참가자 묘사
15세기 프랑스 삽화, 당시 서유럽 갑옷을 입은 전투 참가자 묘사
날짜1071년 8월 26일
장소만지케르트 근처, 이베리아 테마, 아르메니아콘 테마 (현재 튀르키예 말라즈기르트)
결과셀주크 제국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동로마 제국
전투 부대 1동로마 정규군 (타그마타) 및 지방군 (테마 군)
변경 지주들의 봉건 징집병
프랑크족, 잉글랜드인, 노르만족,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튀르크계 페체네그인 및 우즈족 용병
교전국 2셀주크 제국
전투 부대 2튀르크계 페체네그인 및 우즈족 용병
지휘관 및 지도자
동로마 제국 지휘관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포로)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테오도로스 알리아테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셀주크 제국 지휘관알프 아르슬란
아프신 베이
아르투크 베이
술레이만 이븐 쿠탈미쉬
병력 규모
동로마 제국 병력약 40,000명 (전투 전 탈영이 절반에 육박, 튀르크 용병은 셀주크 제국으로 이탈)
200,000명 (튀르키예 및 아랍 자료에 따름)
셀주크 제국 병력35,000명 – 50,000명
사상자 및 피해
동로마 제국 사상자2,000명 – 8,000명 사망
4,000명 포로
20,000명 탈영
셀주크 제국 사상자알 수 없음
영향
결과아나톨리아에 대한 튀르크 통치의 시작, 이민, 점진적인 이슬람화, 튀르크화 및 후기 페르시아화 동반

2. 배경

1038년, 투그릴 베크는 니샤푸르이스파한을 근거지로 호라산 서부 이란 전역을 지배했고, 오구즈계 튀르크 유목민 군대를 이끌고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하였다. 투그릴은 칼리프로부터 공식적으로 술탄 칭호를 받았고, 셀주크 제국이 건국되면서 그 세력은 서쪽 아제르바이잔시리아 방면으로 확장되었다.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시대에는 조지아와 파티마 칼리파국 지배하의 시리아로 진출하였고, 더 나아가 아르메니아에도 눈독을 들였다.

1068년 로마누스 4세가 권력을 잡고 빠른 군사개혁을 단행하여 셀주크군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 원정은 이코니움을 공격한 투르크군의 허를 찔렀고, 비잔티움군은 반격에 나서 승리하여 시리아의 도시 히에라폴리스 밤비스를 탈환했다.[92] 1070년 로마누스 4세는 비잔티움 제국의 요새가 셀주크 군대에게 함락당하자, 알프 아르슬란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는 아나톨리아(오늘날의 무스 지방) 동쪽 끝에 있는 만지케르트를 향하여 두 번째 원정을 시도했다. 로마누스 4세는 아르슬란이 에데사 포위를 풀면 히에라폴리스 밤비스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고, 아르슬란이 이 제안을 따르지 않으면 전쟁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로마누스는 술탄이 제안을 거절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군대를 준비했으며, 실제로 술탄은 제안을 거절했다.

2. 1.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

비록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의 강대국으로 남아있었지만,[86] 제국은 군단을 지휘하는 데 무능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와 역시 무능한 황제 콘스탄티누스 10세가 다스리는 동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87] 2년 동안 다스린 이사키우스 1세 콤네누스의 짧은 개혁은 단지 비잔티움 군대의 몰락을 늦췄을 뿐이다.[87]

1053년경, 콘스탄티누스 9세는 11세기 비잔티움 역사가 요한 스킬리체스(John Skylitzes)가 "이베리아 군대"라고 부른 5만 명의 군대를 해산했다. 스킬리체스의 동시대인이자 전직 관리였던 미카엘 아탈레이아테스(Michael Attaleiates)와 케카우메노스(Kekaumenos)는 콘스탄티노스가 이 병사들을 해산함으로써 제국의 동방 방어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데 동의했다.

콘스탄티누스 9세의 치세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셀주크 제국과 첫 교전을 벌였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셀주크 제국과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1064년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니(ani)를 점령하면서 평화는 깨졌다.[86] 콘스탄티누스 10세는 그의 선임자보다 미덥지 못했다. 1067년 아르메니아가 투르크군에게 점령당했고 카에사레아(Caesarea)가 뒤를 따랐다.[88]

1068년 로마누스 4세가 권력을 잡고 빠른 군사개혁을 단행하여 셀주크군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 원정은 이코니움을 공격한 투르크군의 허를 찔렀고, 비잔티움군은 반격에 나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그에게 시리아의 도시 히에라폴리스 밤비스(Hierapolis Bambyce)를 탈환하게 만들었다.[92]

1071년 2월, 로마누스는 1069년 조약 갱신을 위해 아르슬란에게 사절을 파견했다. 아르슬란은 동의했고, 에데사 공성을 포기하고 즉시 군대를 이끌고 파티마가 지배하는 알레포(Aleppo)를 공격했다. 그러나 평화 조약은 의도적인 눈 가림이었다. 로마누스는 이제 셀주크가 반응할 시간을 주기 전에 잃어버린 요새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이끌었다.[60]

2. 2. 셀주크 제국의 등장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시대 강대국으로 남아있었지만,[86] 군사적으로 무능한 콘스탄티누스 9세와 콘스탄티누스 10세 황제가 통치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사키우스 1세 콤네누스의 2년 간의 짧은 개혁은 비잔티움 군대의 몰락을 늦췄을 뿐이었다.[87]

1038년, 투그릴 베크는 니샤푸르이스파한을 근거지로 호라산 서부 이란 전역을 지배하였고, 오구즈계 튀르크 유목민 군대를 이끌고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하였다. 투그릴은 칼리프로부터 공식적으로 술탄 칭호를 받았고, 셀주크 제국이 건국되면서 그 세력은 서쪽 아제르바이잔시리아 방면으로 확장되었다.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시대에는 조지아와 파티마 칼리파국 지배하의 시리아로 진출하였고, 더 나아가 아르메니아에도 눈독을 들였다. 이것이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과의 대립을 낳게 되었고, 이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 치세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아니 지방을 병합하려고 시도하는 셀주크 제국과 첫 교전을 벌였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군사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평화 조약은 오래가지 못했다. 1063년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군대를 소집해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여 1045년에 잠시 멈추었던 공격을 재개했다. 1064년 셀주크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니를 정복했다.[64]

1060년대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쿠르드족과 그의 투르크계 동맹 세력들을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로 이주시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064년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아니(ani)를 점령했다.[86] 콘스탄티누스 10세(이사키우스 1세 콤네누스의 후계자)는 그의 선임자보다 신뢰를 받지 못했다. 1067년 아르메니아는 투르크군에게 점령당했고 카에사레아(Caesarea)가 뒤를 따랐다.[88] 1068년 로마누스 4세가 권력을 잡고 빠른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셀주크군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 원정은 이코니움을 공격한 투르크군의 허를 찔렀고, 비잔티움군은 반격에 나서 승리했으며, 시리아의 도시 히에라폴리스 밤비스(Hierapolis Bambyce)를 탈환했다.[92]

2. 3. 양국의 갈등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시대에 강력한 세력을 유지했지만,[86] 콘스탄티누스 9세와 콘스탄티누스 10세 황제는 군사적으로 무능하여 제국은 쇠퇴하기 시작했다.[87] 이사키우스 1세 콤네누스의 2년 간의 짧은 개혁은 비잔티움 군대의 몰락을 늦췄을 뿐이다.[87]

1038년, 니샤푸르이스파한을 근거지로 호라산 서부 이란 전역을 지배한 투그릴 베크는 오구즈계 튀르크 유목민 군대를 이끌고 아바스 칼리파국의 수도 바그다드에 입성하였다. 투그릴은 칼리프 알 카임으로부터 술탄 칭호를 받았고, 셀주크 제국이 건국되면서 그 세력은 서쪽 아제르바이잔시리아 방면으로 확장되었다.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시대에는 조지아파티마 칼리파국 지배하의 시리아로 진출하였고, 아르메니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것이 동로마 제국과의 대립을 낳게 되었고, 이 전투로 이어지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 치세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아르메니아의 아니 지방을 병합하려고 시도하는 셀주크 제국과 첫 교전을 벌였다. 콘스탄티누스 9세는 군사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평화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평화 조약은 오래가지 못했다. 1063년 셀주크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은 군사를 소집해 아르메니아를 침략하여 1045년에 잠시 멈추었던 공격을 재개했다. 1060년 알프 아르슬란은 쿠르드족과 그의 투르크계 동맹자들을 아르메니아와 소아시아로 이주시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1064년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아니(ani)를 점령했다.[86]

1067년 아르메니아가 투르크군에게 점령당했고 카에사레아(Caesarea)가 뒤를 따랐다.[88] 1068년 로마누스 4세가 권력을 잡고 빠른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셀주크군에 대항하기 위한 원정을 개시했다. 이 원정은 이코니움을 공격한 투르크군의 허를 찔렀고, 비잔티움군은 반격에 나서 승리하여 시리아의 도시 히에라폴리스 밤비스(Hierapolis Bambyce)를 탈환했다.[92]

1071년 2월, 로마누스는 1069년 조약을 갱신하기 위해 아르슬란에게 사절을 보냈다. 아르슬란은 북쪽 측면의 공격을 막고자 했고, 로마누스의 제안에 동의했다.[60] 에데사 공성을 포기하고 즉시 군대를 이끌고 파티마 칼리파국이 지배하는 알레포를 공격했다. 그러나 평화 조약은 의도적인 속임수였다. 로마누스는 셀주크가 반응할 시간을 주기 전에 잃어버린 요새를 되찾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이끌었다.[60]

3. 전투 준비

로마누스 4세는 정적 안드로니쿠스 두카스를 대동하고 원정을 시작했다. 비잔티움 제국군은 서부와 동부 지역 출신 각각 5,000명, 루셀 드 바일류 휘하 프랑크족과 노르만 용병 500명, 오구즈족과 페체네그인 등 투르크계 용병, 불가리아 용병, 안티오키아 보병대, 아르메니아 군대, 바랑기안 친위대 일부 혹은 전부를 포함하여 총 40,000명에서 70,000명에 달하는 병력이었다.[89][59][67]

소아시아 원정은 길고 힘들었다. 로마누스는 사치스러운 물품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고 다녀 병사들의 경멸을 샀고, 프랑크 용병들의 약탈로 백성들도 고통받았다. 원정군은 할리스에 있는 세바스테이아에서 휴식 후, 1071년 6월 테오도시오폴리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장군들 사이에 셀주크 영토로 진군할지, 아니면 기다리며 요새를 강화할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진군하기로 결정했다.[23]

셀주크 왕조의 알프 아르슬란


비잔티움과 평화를 맺은 셀주크는 알프 아르슬란이 알레포에서 비잔티움의 진격 소식을 듣기 전까지 이집트를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는 북쪽으로 돌아와 반 호수 북쪽에서 비잔티움과 만났다.


아르슬란이 멀리 있을 것이라 예상한 로마누스는 반 호수로 진군하여 만지케르트를 빠르게 탈환하려 했다. 그러나 아르슬란은 알레포, 모술 등에서 온 동맹군과 30,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이미 아르메니아에 있었다. 아르슬란의 첩보망은 로마누스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한 반면, 로마누스는 적의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25]

로마누스는 요셉 타르카니오테스에게 비잔티움군, 바랑기안, 페체네그인, 프랑크군 일부를 맡겨 클리앗으로 보내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만지케르트로 향했다. 이로써 군대는 각각 약 20,000명으로 나뉘었다. 타르카니오테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슬람 기록에는 아르슬란이 격파했다고 하지만, 비잔티움 기록에는 언급이 없다. 아탈레이아테스는 타르카니오테스가 셀주크 술탄을 보고 도망쳤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낮다. 어쨌든 로마누스의 군대는 원래 계획했던 병력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20]

3. 1.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 원정

로마누스와 동행한 사람 중에는 그의 정적 안드로니쿠스 두카스가 있었다. 군대는 제국 서부 지역에서 온 5,000명의 비잔티움 군대와 거의 비슷한 숫자의 동부 지역에서 온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루셀 드 바일류 휘하의 500명의 프랑크족, 노르만 용병, 일부 투르크계 (오구즈족과 페체네그인) 용병들과 불가리아 용병들도 있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 보병대, 아르메니아가 담당한 군대도 있었으며, 일부(혹은 전부)의 바랑기안 친위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총 병력은 약 40,000명에 달했다.[89] 비잔티움 군관구 부대의 질은 로마누스의 이전 시대부터 질이 저하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중앙정부는 모병 자원으로써 제국 내부의 실제적인 싸움이나 인기에 관련된 것에 덜 관심을 가질 것으로 여겨지는 용병들에게 눈을 돌렸다. 제국 정부는 심지어 용병을 사용한 이후, 돈을 아끼기 위해 바로 해산시켜 버렸다.

소아시아를 가로질러 진군하는 것은 길고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로마누스는 비싼 소지품들을 가득 실은 마차들을 병사들과 함께 가게 함으로써 병사들로부터 경멸을 샀다. 비잔티움 백성들은 해산을 강요받은 로마누스의 프랑크 용병들에 의해 고통받고 있었다. 원정군은 할리스에 있는 세바스테이아에서 처음 휴식을 했다. 그리고 1071년 6월 테오도시오폴리스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몇몇 장군들이 아르슬란이 준비를 하기 전에 셀주크 영토로 쳐들어가 그를 사로잡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니케포루스 브리엔니우스를 포함한 다른 장군들은 이곳에 머물러 요새화 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회의 끝에 진군을 계속하기로 결정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은 좀 더 멀리 있거나 아직 오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 로마누스는 반 호수를 향해 진군하여 만지케르트를 좀 더 빨리 탈환할 것이라 기대했고, 가능하다면 근처 요새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르슬란은 사실 알레포, 모술, 그리고 그의 동맹자들로부터 모집한 30,0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아르메니아에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의 스파이는 로마누스가 그의 적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 로마누스의 움직임을 완벽히 알고 있었다.

로마누스는 자신과 나머지 군대가 만지케르트로 향하는 동안, 그의 장군 요셉 타르카니오테스에게 비잔티움군과 바랑기안, 그리고 페체네그인과 프랑크군 일부를 맡겨 클리앗으로 향하게 했다. 이것은 군대를 각각 20,000명의 병력으로 나누는 것이 되었다. 요셉 타카네이오테스와 함께 보내진 군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진 것은 없다.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아르슬란은 그의 군대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잔티움 기록은 이 교전에 대하여 침묵으로 남아있다. 비록 아탈레이아스는 타카네이오테스가 셀주크 술탄의 눈을 피해 달아났다고 주장하나 이는 비잔티움 장군의 평판을 생각해 보건대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튼 로마누스의 군대는 그가 계획했던 40,000명에서 반으로 줄어 있었다.[89]

3. 2. 군대 구성

로마누스와 동행한 사람 중에는 그의 정적 안드로니쿠스 두카스가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군은 서부 지역 출신 5,000명과 동부 지역 출신 5,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러셀 데 바일류 휘하의 프랑크족, 노르만 용병 500명, 투르크(오구즈족과 페체네그인) 용병, 불가리아 용병, 안티오키아 보병대, 아르메니아가 담당한 군대, 일부(혹은 전부) 바랑기안 친위대가 포함되어 총 병력은 약 40,000명에서 최대 70,000명에 달했다.[89]

로마누스 이전 수년 동안 지방군의 수는 감소했는데, 이는 중앙 정부가 정치에 개입할 가능성이 적다고 판단되는 용병들에게 자금을 투입하고,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사용 후 해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20]

알프 아르슬란알레포, 모술 등 동맹군으로부터 모집한 30,0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아르메니아에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의 첩보망은 로마누스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했지만, 로마누스는 적의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89]

로마누스는 요셉 타카네이오테스에게 비잔티움군과 바랑기안, 페체네그인, 프랑크군 일부를 맡겨 클리앗으로 향하게 했다. 이로써 군대는 각각 약 20,000명으로 나뉘었다. 요셉 타카네이오테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슬람 기록에는 아르슬란이 그의 군대를 공격했다고 하지만, 비잔티움 기록에는 이 교전에 대한 언급이 없다. 아탈레이아스는 타카네이오테스가 셀주크 술탄을 피해 달아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비잔티움 장군의 평판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낮다. 결국 로마누스의 군대는 계획했던 절반 수준으로 줄어 있었다.[89]

3. 3. 알프 아르슬란의 대응



로마노스 4세와 동행한 안드로니코스 두카스는 섭정이자 직접적인 정적이었다. 로마노스 4세의 군대는 서방 속주 출신 로마 정규군 5,000명, 동방 속주 출신 군대 약 5,000명, 루셀 드 바일류가 지휘하는 프랑크 및 노르만 용병 500명, 안티오키아 공작이 지휘하는 터키인(오구즈족), 페체네그족 및 불가리아인 용병, 조지아아르메니아 군대, 바랑기아 근위대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4만 명에서 7만 명에 달했다.[59][67]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진군은 길고 힘든 여정이었으며, 로마노스 4세는 호화로운 행렬을 동반하여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로마 시민들은 또한 로마노스 4세 군대의 프랑크 용병에게 약탈당하여 고통받았다.

1071년 6월, 테오도시오폴리스에 도착한 원정군은 쿠주르울마크 강(할뤼스 강)의 시바스(세바스티아)에서 첫 휴식을 취했다. 그곳에서 일부 장군들은 셀주크 제국의 영토로 진군하여 알프 아르슬란이 군대를 정비하기 전에 그를 사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케포로스 브리엔니오스를 포함한 다른 장군들은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방어 시설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종적으로 진군을 계속하기로 결정되었다.

알프 아르슬란이 멀리 있거나 전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로마노스 4세는 반 호까지 진군하여, 아흘라트 요새보다 가까운 말라즈기르트를 신속하게 탈환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알프 아르슬란은 알레포모술 출신 기병 3만 명과 함께 이미 그 지역에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의 정찰병은 로마노스 4세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로마노스 4세는 적의 움직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로마노스 4세는 이오세프 타르카네이오테스 장군에게 로마 군대, 바랑기아 근위대, 페체네그족, 프랑크족 군대를 이끌고 아흘라트 요새를 점령하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나머지 군대와 함께 말라즈기르트로 진군했다. 이로 인해 양측의 병력은 약 2만 명으로 나뉘었다. 이오세프 타르카네이오테스와 함께 분리된 군대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이슬람 측 기록에 따르면 이 군대는 알프 아르슬란에 의해 궤멸되었지만, 로마 측 기록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다. 동로마 역사가 미카엘 아탈레이아테스는 타르카네이오테스가 셀주크 군대를 보고 도망쳤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로마 군대의 명성을 고려할 때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결국 로마노스 4세의 군대는 초기 4만~7만 명의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59][67]

3. 4. 군대 분할

로마누스와 동행한 사람 중에는 그의 정적이었던 안드로니쿠스 두카스가 있었다. 군대는 제국 서부 지역에서 온 5,000명의 비잔티움 군대와 거의 비슷한 숫자의 동부 지역에서 온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루셀 드 바이유 휘하의 500명의 프랑크족, 노르만 용병들과 일부 투르크계 (오구즈족과 페체네그인) 용병들, 불가리아 용병들도 있었다. 그리고 안티오키아 보병대, 아르메니아가 담당한 군대도 있었으며, 일부(혹은 전부)의 바랑기안 친위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총 병력은 약 40,000명에 달했다.[89][20] 비잔티움 군관구 부대의 질은 로마누스 이전 시대부터 질이 저하되고 있었는데, 중앙정부는 모병 자원으로써 제국 내부의 실제적인 싸움이나 인기에 관련된 것에 덜 관심을 가질 것으로 여겨지는 용병들에게 눈을 돌렸다. 제국 정부는 심지어 용병을 사용한 이후, 돈을 아끼기 위해 바로 해산시켜 버렸다.[89][21]

소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진군은 길고 힘든 일이었다. 로마누스는 비싼 소지품들을 가득 실은 마차들을 병사들과 함께 가게 함으로써 병사들로부터 경멸을 샀다. 비잔티움 백성들은 해산을 강요받은 로마누스의 프랑크 용병들에 의해 고통받고 있었다. 원정군은 할리스에 있는 세바스테이아에서 처음 휴식을 했다. 그리고 1071년 6월 테오도시오폴리스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몇몇 장군들이 아르슬란이 준비를 하기 전에 셀주크 영토로 쳐들어가 그를 사로잡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니케포루스 브리엔니우스를 포함한 다른 장군들은 이곳에 머물러 요새화 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회의 끝에 진군을 계속하기로 결정되었다.[23]

알프 아르슬란은 좀 더 멀리 있거나 아직 오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 로마누스는 반 호수를 향해 진군하여 만지케르트를 좀 더 빨리 탈환할 것이라 기대했고, 가능하다면 근처 요새도 탈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르슬란은 사실 알레포, 모술, 그리고 그의 동맹자들로부터 모집한 30,000명의 기병대와 함께 아르메니아에 있었다. 알프 아르슬란의 스파이는 로마누스가 그의 적의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 로마누스의 움직임을 완벽히 알고 있었다.[25]

로마누스는 자신과 나머지 군대가 만지케르트로 향하는 동안, 그의 장군 요셉 타카네이오테스에게 비잔티움군과 바랑기안, 그리고 페체네그인과 프랑크군 일부를 맡겨 클리앗으로 향하게 했다. 이것은 군대를 각각 20,000명의 병력으로 나누는 것이 되었다. 요셉 타카네이오테스와 함께 보내진 군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진 것은 없다. 이슬람의 기록에 따르면 아르슬란은 그의 군대를 공격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잔티움 기록은 이 교전에 대하여 침묵으로 남아있다. 아탈레이아스는 타카네이오테스가 셀주크 술탄의 눈을 피해 달아났다고 주장하나 이는 비잔티움 장군의 평판을 생각해 보건대 있음직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아무튼 로마누스의 군대는 그가 계획했던 40,000명에서 반으로 줄어 있었다.[20]

4. 전투 및 상황

8월 23일 로마누스 4세는 타르카네이오테스의 군대를 잃은 사실을 모른 채 만지케르트로 진군하여 쉽게 점령했다. 셀주크군은 궁병의 맹렬한 반격으로 응수했다.[67] 만지케르트는 북쪽의 개울과 남쪽의 반 호에 끼인 완만한 구릉이 있는 열린 평야였다. 다음 날, 브리엔니오스가 이끄는 군량 조달 부대가 셀주크군과 조우하여 만지케르트로 후퇴했다. 로마누스는 이것을 알프 아르슬란의 전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의 바실라케스에게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보냈지만 전멸했고, 바실라케스는 포로가 되었다. 로마누스는 진을 쳤지만, 좌익의 브리엔니오스가 터키군의 빠른 진격에 의해 포위되었기 때문에 좌익은 후퇴했다. 해가 지자 셀주크군은 근처 구릉의 그늘에 병사들을 물렸기 때문에 로마누스는 반격할 수 없었다.[70][68]

8월 25일, 로마누스는 셀주크 측의 평화 협상을 거절했다. 로마누스는 제국의 동방 문제와 터키의 끊임없는 침입을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로 해결하기를 바랐다. 또한, 여기서 일단 평화를 맺고 기회를 다시 봐서 셀주크 제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어렵고 전비도 막대하게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동로마군 진영에 있던 몇몇 터키인 용병들이 셀주크군에 복무하던 친척을 방문했다가 그대로 탈영했다. 로마누스는 타르카네이오테스를 불러들이려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전투 당일 아침, 알프 아르슬란은 모은 군세 앞에 이슬람교의 순교자 복장인 흰옷을 입고 나타나 연설을 했다.[26] 이는 그가 전투에서 죽을 준비가 되었다는 격려의 메시지였다.

8월 26일, 동로마군은 전투 대형을 취하고 터키 진영을 향해 진격했다. 좌익에는 브리엔니오스가 이끄는 유럽 테마 출신의 소집병, 우익에는 카파도키아의 장군 테오도시우스 알리아테스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기병과 테마 카르시아노스의 기병, 그리고 중앙에는 로마누스 자신이 이끌고 근위병과 제국 중앙 테마의 병사들이 굳건히 자리 잡았다. 주력 후방에는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이끄는 예비 부대가 배치되었다. 두카스는 황제 로마누스의 정치적 경쟁자였고, 그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생각하면 이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동로마군이 셀주크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하자, 알프 아르슬란 옆에 있는 터키 병사가 "폐하, 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셀주크군은 동로마군으로부터 4km 떨어진 곳에 초승달 형태의 진형을 취했다.[69] 동로마군에 접근하자 셀주크군의 궁기병이 후퇴하면서 화살을 빗발치듯이 퍼부었다. 셀주크 기병은 적이 접근하여 공격을 시도하면 말 위에서 활을 쏘면서 후퇴하는, 소위 초원 유목민의 전통적인 일격이탈전법을 취했다. 셀주크군 중앙이 점차 후퇴하는 동시에 양익은 동로마군을 포위하듯이 움직였다.

4. 1. 전투의 전개

8월 23일,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군은 만지케르트를 손쉽게 점령했다. 그러나 셀주크 제국군은 궁병대를 동원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반격했다.[84] 다음 날, 브리에니오스 휘하의 비잔티움군 수렵 부대가 셀주크 군대를 발견하고 만지케르트로 퇴각했다. 로마누스 4세는 셀주크 군대가 알프 아르슬란의 전군(全軍)이 아니라고 판단하여 아르메니아 장군 바실라세스를 기병대와 함께 출진시켰으나, 기병대는 전멸하고 바실라세스는 포로로 잡혔다. 로마누스 4세는 군대를 재배치하고 좌익 부대를 출진시켰지만, 이들 역시 튀르크 군대에 포위되어 일부는 퇴각해야 했다. 튀르크 군대는 밤 동안 언덕 근처에 숨어 로마누스 4세의 반격을 어렵게 만들었다.[92][90]

8월 25일, 로마누스 4세의 튀르크인 용병들은 셀주크인 친척들과 접촉한 후 도망쳤다. 로마누스 4세는 셀주크 족의 평화 사절이 제시한 요구를 거절했는데, 이는 튀르키예 문제를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로 해결하고, 다른 군대들이 제국을 침략하는 것이 어렵고 피해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타카네이오스를 다시 부르려 시도했지만, 그는 이미 그 지역을 떠난 후였다. 그날에는 교전이 없었으나, 8월 26일 비잔티움군은 튀르키예군의 진형에 대응하여 적절한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좌익은 브리에니오스, 우익은 테오도레 알리아테스, 중앙은 황제가 직접 맡았다. 안드로니쿠스 두카스는 배후에서 잔여 병력을 담당했는데, 두카스 가문의 충성도를 고려하면 이는 어리석은 실수였다. 셀주크군은 4km 떨어진 곳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형을 조직했고,[91] 아르슬란은 안전한 거리에서 상황을 관찰했다. 셀주크 궁병들은 비잔티움군이 사거리 내에 들어오자 공격을 가했고, 셀주크군의 초승달 진형 가운데는 계속 뒤로 물러서면서 좌우익이 비잔티움 군을 포위하는 형태를 취했다.

비잔티움 영토 (보라색), 비잔티움군 공격 (빨간색), 셀주크군 공격 (녹색)


비잔티움군은 궁병들의 공격을 뚫고 전진하여 점심 무렵 알프 아르슬란의 진영을 점령했다. 그러나 궁병들에게 큰 피해를 입은 좌익과 우익은 개별 부대가 셀주크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거의 괴멸 상태에 이르렀다. 셀주크 기병대는 공격을 받으면 퇴각하는, 초원 전사들의 전형적인 '치고 빠지기 전술'(hit and run tactics)을 사용했다. 셀주크군이 전투를 피하자 로마누스 4세는 밤이 되면서 군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우익은 명령을 잘못 이해했고, 로마누스 4세의 정적인 두카스는 황제를 무시하고 퇴각을 돕는 대신 만지케르트 외부에 있는 캠프로 돌아갔다. 비잔티움 제국군은 혼란에 빠졌고, 셀주크군은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92] 비잔티움군의 우익은 물러섰고, 좌익 역시 잠시 버티다가 퇴각했다.[93] 황제와 바랑기아 친위대를 포함한 비잔티움 중앙군의 잔존 병력은 셀주크군에 포위되었다. 로마누스 4세는 부상을 입고 셀주크군의 포로가 되었다. 전장에 흩어져 있던 생존자들은 밤을 틈타 도망쳤으나, 그것이 한계였다. 날이 밝자 농민병들과 징집병들은 모두 도망쳤고, 비잔티움 군의 주력은 괴멸되었다.[93]

4. 2. 비잔티움 군의 패배

8월 23일 로마누스 4세는 타르카네이오테스의 군대를 잃은 사실을 모른 채 만지케르트로 진군하여 쉽게 점령했다. 셀주크군은 궁병의 맹렬한 반격으로 응수했다.[84] 다음 날, 브리엔니오스가 이끄는 군량 조달 부대가 셀주크군과 조우하여 만지케르트로 후퇴했다. 로마누스는 이것을 알프 아르슬란의 전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아르메니아의 바실라케스에게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보냈지만 전멸했고, 바실라케스는 포로가 되었다. 로마누스는 진을 쳤지만, 좌익의 브리엔니오스가 터키군의 빠른 진격에 의해 포위되었기 때문에 좌익은 후퇴했다. 해가 지자 셀주크군은 근처 구릉의 그늘에 병사들을 물렸기 때문에 로마누스는 반격할 수 없었다.[92][90]

8월 25일, 로마누스는 셀주크 측의 평화 협상을 거절했다. 그는 제국의 동방 문제와 터키의 끊임없는 침입을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로 해결하기를 바랐다. 또한, 여기서 일단 평화를 맺고 기회를 다시 봐서 셀주크 제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일으키는 것은 어렵고 전비도 막대하게 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날 동로마군 진영에 있던 몇몇 터키인 용병들이 셀주크군에 복무하던 친척을 방문했다가 그대로 탈영했다.[91] 로마누스는 타르카네이오테스를 불러들이려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8월 26일, 동로마군은 전투 대형을 취하고 터키 진영을 향해 진격했다. 좌익에는 브리엔니오스가 이끄는 유럽 테마 출신의 소집병, 우익에는 카파도키아의 장군 테오도시우스 알리아테스가 이끄는 아르메니아 기병과 테마 카르시아노스의 기병, 그리고 중앙에는 로마누스 자신이 이끌고 근위병과 제국 중앙 테마의 병사들이 굳건히 자리 잡았다. 주력 후방에는 고용된 게르만인 기병대와 이탈리아 노르만인 부대, 제국 동부 주에서 모집된 병사들로 구성된 예비 부대가 배치되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이끌었다. 두카스는 황제 로마누스의 정치적 경쟁자이기도 했고, 그의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생각하면 이것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동로마군이 셀주크군을 향해 진격을 시작하자, 알프 아르슬란 옆에 있는 터키 병사가 "폐하, 적이 다가오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알프 아르슬란은 "적이 다가오고 있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셀주크군은 동로마군으로부터 4km 떨어진 곳에 초승달 형태의 진형을 취했다.[91] 동로마군에 접근하자 셀주크군의 궁기병이 후퇴하면서 화살을 빗발치듯이 퍼부었다. 셀주크 기병은 적이 접근하여 공격을 시도하면 말 위에서 활을 쏘면서 후퇴하는, 소위 초원 유목민의 전통적인 일격이탈전법을 취했다. 셀주크군 중앙이 점차 후퇴하는 동시에 양익은 동로마군을 포위하듯이 움직였다.

동로마군 중앙은 셀주크의 맹렬한 사격을 견디면서 저녁에는 텅 빈 알프 아르슬란의 본진을 점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 양익은 셀주크 궁병의 공격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각 부대가 셀주크군과 접촉하려 할 무렵에는 거의 붕괴 직전이었다.

셀주크군이 백병전을 피했기 때문에 로마누스는 해가 지자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지만, 우익에는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또한 황제의 라이벌인 두카스는 황제를 버리고 후퇴를 지원하지 않고 전장 밖에 있는 야영지로 후퇴했다. 동로마군은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졌고, 중앙과 양익 사이에 틈이 생기자 셀주크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격으로 돌아섰고, 알프 아르슬란은 여력을 남긴 수천 명의 기병대를 투입했다.[92] 동로마군 후위에서는 "아르메니아군과 터키인들이 배신하고 황제가 살해되었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고, 동요한 우익은 궤멸되었다. 실제로 아르메니아군이 가장 먼저 전장에서 도망쳐 간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로마군의 터키 부대는 끝까지 황제에게 충성했다. 브리엔니오스가 이끄는 좌익도 한동안 버텼지만, 곧 붕괴되었다.[93]

황제와 친위대인 바랑기아 근위대 등 동로마군 중앙이 남겨져 셀주크군에 포위되었다. 로마누스는 부상을 입고 셀주크군에 사로잡혔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셀주크군에게 추격당해 밤새도록 학살이 계속되었다. 직업 군인으로 구성된 동로마군의 핵심은 궤멸되었다. 소작농과 징집병으로 구성된 부대의 대부분은 두카스의 지휘 아래 전장에서 이탈했다.[93]

4. 3. 로마노스 4세의 포로 됨



로마누스 4세가 알프 아르슬란 앞으로 끌려가자, 술탄은 흙투성이에 피투성이가 된 누더기 차림의 그가 로마 황제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의 신분을 확인한 알프 아르슬란은 황제의 목에 자신의 장화를 올려놓고 땅에 입맞추도록 강요했는데, 당시에는 전통적인 상징적 제스처였다.[36] 알프 아르슬란은 그 후 로마누스를 상당히 친절하게 대하며 전투 전에 제안했던 평화 조건을 다시 제시했다.[37]

이븐 알 아딤에 따르면, 아르슬란 앞에서 로마누스는 라시드 알 다울라 마흐무드의 비잔티움 영토 침략을 비난하며, 이것이 결국 만지케르트 전투로 이어진 무슬림 영토 개입의 이유라고 주장했다.[38]

다음은 둘 사이에 오고 간 유명한 대화이다.[72]

: 알프 아르슬란: "만약 내가 당신 앞에 포로로 끌려왔다면, 당신은 어떻게 했겠소?"

: 로마누스: "아마 당신을 죽이거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 알프 아르슬란: "내 처벌은 그보다 훨씬 가볍소. 당신을 사면하고, 풀어주겠소."

로마누스는 일주일 동안 술탄의 포로로 남았다. 이 기간 동안 술탄은 로마누스와 함께 식사를 하며 양보를 이끌어냈다. 안티오키아, 에데사, 히에라폴리스, 만지케르트가 할양될 예정이었다.[12] 이것은 아나톨리아의 중요한 중심부는 건드리지 않은 채로 남겨두는 것이었다. 로마누스의 몸값으로 술탄이 요구한 1천만 금화는 너무 과도한 금액으로 여겨졌기에, 술탄은 초기 지불로 150만 금화를 요구하고, 그 후 매년 360000gold를 지불하는 것으로 단기 비용을 줄였다.[12] 또한 알프 아르슬란의 아들과 로마누스의 딸 사이의 정략결혼 동맹이 준비되었다.[6] 술탄은 로마누스에게 많은 선물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가는 길에 두 명의 아미르와 백 명의 맘루크로 구성된 호위대를 제공했다.[39]

로마누스는 신하들에게 돌아온 직후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충성스러운 군대를 모으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카스 가문과의 전투에서 세 번이나 패배하고 폐위되어 눈이 뽑히고 프로티 섬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잔혹한 눈뽑기에 의한 감염으로 얼마 후 사망했다. 로마누스가 그토록 열심히 방어해 온 아나톨리아 중심부로의 마지막 진출은 공개적인 굴욕으로 끝났다.[12]

5. 전투의 영향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에 큰 전략적 손실을 가져왔지만, 초기 역사가들이 묘사한 것처럼 대규모 학살은 아니었다.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군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고,[95] 많은 부대가 전투에서 살아남아 몇 달 안에 다른 곳에서 싸웠다고 추정한다.[96] 비잔티움 측 지휘관들(두카스, 타르카네이오테스, 브리엔니오스, 드 바이유, 로마누스 4세 황제)도 생존하여 이후 사건에 참여했다.[96]

두카스는 피해 없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로마누스 4세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미카일 7세를 황제로 옹립했다.[85] 브리엔니오스도 일부 병력을 잃었지만, 셀주크 군은 비잔티움 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만지케르트도 다시 점령하지 않았다. 비잔티움 군은 도케이아에서 재집결하여 석방된 로마누스 4세와 합류했다. 가장 큰 손실은 황제의 값비싼 화물 마차였다.

이 전투의 결과, 비잔티움 제국은 아나톨리아 중심부를 상실했다. 존 율리우스 노리치는 이 패배를 "제국의 심장"과 같았던 아나톨리아 군관구 상실로 이어져 제국에 "치명타"를 안겼다고 평가했다. 그의 저서 《비잔티움의 짧은 역사》에서는 이 전투를 "제국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라고 묘사했다.[98] 안나 콤네나는 전투 후 수십 년 뒤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로마 제국의 운명은 썰물의 극한에 이르렀다. 동방에서 군대가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투르크는 영토를 확장하여 흑해, 헬레스폰토스, 에게 해, 시리아의 바다(지중해), 팜필리아, 실리시아를 씻는 여러 만과 아무것도 없는 이집트의 바다(지중해)의 여러 국가의 지배권을 획득했다.[97]

이후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제국 쇠퇴의 시작점으로 보았고, 군대 규모와 사상자 수를 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패배는 셀주크에게 비잔티움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권력 찬탈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어 투르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98] 결국 10년간 소아시아 전역은 완전히 점령당했다.[98] 로마누스 4세의 비극적인 운명은 제국에 수 세기 동안 혼란을 야기했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왕위 찬탈 시도, 로마누스 4세의 불행한 운명, 루셀 드 바이유의 독립 왕국 건설 시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제국을 더욱 약화시켰다.[100] 제국은 루셀 드 바이유를 진압하기 위해 셀주크에 도움을 요청했고, 셀주크는 이를 이용했다. 1077년 셀주크가 니케아(이즈니크)에 수도를 세운 것은 이러한 혼란을 틈탄 것이었다.

폴 K. 데이비스는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이 아나톨리아 통제권을 상실하고 무슬림 세력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었으며, 이는 제국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평가했다. 또한, 이 전투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원인 중 하나로, 서유럽이 비잔티움의 군사적 지원 요청에 응답한 결과였다.[99] 서방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통해 비잔티움이 더 이상 동방 기독교중동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만지케르트 전투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로마누스 4세는 "용감하고 정직한 사람을 순교"시킨 결과, "제국은...결코 회복되지 못했다."[100]

알프 아르슬란이 1072년 사망한 후에야 투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로 이동했습니다.

5. 1. 비잔티움 제국의 내분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에 큰 전략적 손실을 가져왔지만, 초기 역사 기록처럼 대규모 학살은 아니었다.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군의 피해가 비교적 적었고,[40][41] 많은 부대가 살아남아 다른 전선에서 계속 싸웠으며, 포로들도 대부분 석방되었다고 본다.[41] 비잔티움 측 지휘관들(두카스, 타르카네이오테스, 브리엔니오스, 테오도르 알리아테스, 드 바이유, 로마누스 4세 황제)도 생존하여 이후 사건에 참여했다.[42]

이 전투가 비잔티움과 셀주크 제국 간의 세력 균형을 즉시 바꾸지는 않았지만, 이후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발생한 권력 다툼이 셀주크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41] 특히, 두카스는 피해 없이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로마누스 4세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미카일 7세를 황제로 옹립했다.[12] 브리엔니오스도 일부 병력을 잃었지만, 셀주크 군은 비잔티움 군을 추격하거나 만지케르트를 점령하지 않았다. 비잔티움 군은 도케이아에서 재집결하여 석방된 로마누스 4세와 합류했다. 가장 큰 손실은 황제의 값비싼 물품들이었다.[43]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이 패배를 "제국의 심장"과 같았던 아나톨리아 군관구 상실로 이어져 제국에 "치명타"를 안겼다고 평가했다.[44] 스티븐 런시먼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재앙"이라고 묘사했다.[45] 안나 콤네나는 "로마 제국의 운명은 최저점으로 가라앉았다"라고 기록했다.[46]

이후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제국 쇠퇴의 시작점으로 보았고, 군대 규모와 사상자 수를 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패배는 셀주크에게 비잔티움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권력 찬탈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어 투르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저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47] 로마누스 4세의 비극적인 운명은 제국에 수 세기 동안 혼란을 야기했다.[48]

소아시아에서 투르크 침략의 첫 번째 물결(1204년까지) 동안 영향을 받은 정착지와 지역.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왕위 찬탈 시도, 로마누스 4세의 불행한 운명, 루셀 드 바이유의 독립 왕국 건설 시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제국을 더욱 약화시켰다.[53] 제국은 루셀 드 바이유를 진압하기 위해 셀주크에 도움을 요청했고, 셀주크는 이를 이용했다. 1077년 셀주크가 니카이아(이즈니크)에 수도를 세운 것은 이러한 혼란을 틈탄 것이었다.

폴 K. 데이비스는 만지케르트 전투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이 아나톨리아 통제권을 상실하고 무슬림 세력에게 지배권을 넘겨주었으며, 이는 제국의 군사력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평가했다.[49] 또한, 이 전투는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원인 중 하나로, 서유럽이 비잔티움의 군사적 지원 요청에 응답한 결과였다.[50] 서방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통해 비잔티움이 더 이상 동방 기독교중동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델브뤼크는 전투의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보지만, 이 전투로 인해 제국이 오랫동안 효과적인 군대를 투입할 수 없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지적한다.[51]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만지케르트 전투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로마누스 4세는 "용감하고 정직한 사람을 순교"시킨 결과, "제국은...결코 회복되지 못했다."[53]

5. 2. 아나톨리아 상실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에게 장기적인 전략적 재앙이었지만, 초기에 알려진 것만큼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었다.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군의 손실이 비교적 적었다고 평가한다.[40][41] 많은 부대가 전투에서 살아남아 몇 달 후 다른 곳에서 전투를 계속했고, 포로로 잡혔던 비잔티움 병사들 대부분은 나중에 석방되었다.[41] 비잔티움 측 지휘관들(두카스, 타르카네이오테스, 브리엔니오스, 테오도르 알리아테스, 드 바이유, 로마누스 4세)은 모두 살아남아 이후 사건에 참여했다.[42]

이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제국 간의 세력 균형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않았지만, 이후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발생한 내전이 셀주크 제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41] 두카스는 피해 없이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로마누스 4세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미카엘 7세를 황제로 선포했다.[12] 브리엔니오스 또한 퇴각 중 소수의 병력만 잃었다. 셀주크 군대는 비잔티움 군대를 추격하지 않았고, 만지케르트도 다시 점령하지 않았다. 비잔티움 군대는 재편성하여 도케이아로 진군했고, 일주일 후 풀려난 로마누스 4세와 합류했다. 가장 큰 손실은 황제의 값비싼 화물 마차였다.[43]

이 전투의 결과, 비잔티움 제국은 아나톨리아 중심부를 상실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이 패배를 "제국의 심장과 같았던 아나톨리아 군관구가 사라졌으며, 이는 제국의 사망 선고와 같았다"고 묘사했다. 그의 저서 《비잔티움의 짧은 역사》에서는 이 전투를 "제국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이라고 표현했다.[44] 스티븐 런시먼은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재앙이었다."라고 썼다.[45]

안나 콤네나는 전투 후 수십 년 뒤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로마 제국의 운명은 썰물의 극한에 이르렀다. 동방에서 군대가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투르크는 영토를 확장하여 흑해와 헤르소스와 에게 해와 시리아의 바다(지중해)와 팜필리아, 키리키아를 씻는 여러 만과 아무것도 없는 이집트의 바다(지중해)의 여러 국가의 지배권을 획득했다.[46]

만지케르트 전투는 제국의 재앙으로 여겨졌고, 이후 기록들은 군대 규모와 사상자 수를 과장했다.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이날을 "재앙"으로 표현하며 제국의 쇠퇴가 시작된 시점으로 보았다. 이 패배는 셀주크인들에게 비잔티움인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강탈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전투 이후 이어진 투르크인들의 이동에 저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47] 로마누스 4세의 끔찍한 운명은 제국에 수세기 동안 혼란을 야기했다.[48]

전투 이후 왕위 찬탈 시도, 로마누스 4세의 불행한 운명, 루셀 드 바이유가 갈라티아에 독립 왕국을 세우려 한 시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제국을 약화시켰다.[53] 제국은 루셀 드 바이유를 격퇴하기 위해 셀주크에 도움을 요청했고, 셀주크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투르크인들은 알렉시오스 콤네소스가 루셀 드 바이유를 체포하기 위해 추적하자, 몸값을 받고 그를 아내에게 돌려보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투르크가 채우게 될 힘의 공백을 만들었다. 셀주크 인들이 1077년 니케아(이즈니크)에 수도를 세운 것은 제국의 고난이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는지를 보려는 욕구로 설명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비잔티움과 당대 역사가들은 이 전투로 비잔티움 제국의 운이 쇠락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폴 K. 데이비스는 "비잔티움의 패배는 병사들을 위한 주요 모병 장소인 아나톨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함으로써 비잔티움의 힘을 심각하게 제한했다."라고 썼다.[49] 또한, 이 전투는 십자군 운동의 원인 중 하나로 해석되었는데, 1095년 제1차 십자군은 아나톨리아 상실 이후 비잔티움 황제의 서방에 대한 군사적 지원 요청으로 인해 시작되었다.[50] 다른 시각으로 보면 서방은 만지케르트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을 더 이상 동방 교회와 중동의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보호자로 보지 않게 된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델브룩은 이 전투의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 전투의 결과로 제국은 향후 수 년 동안 전장에 효율적인 군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대한 '쇠락'의 지점으로서 흔히 만지케르트 전투와 비교된다. 두 전투는 백년이 넘는 간격을 두고 벌어진 사건이지만, 비대한 비잔티움군이 좀더 찾기 힘든 셀주크인 적들의 매복에 당해 패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힘을 유지한 덕분에 미리오케팔룸의 의미는 처음부터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로마누스에게는 똑같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적은 "용감하고 올바른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으며", 이 결과 "제국은...회복되지 못했다."[100]

5. 3. 십자군 전쟁의 배경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에 장기적인 전략적 재앙이었지만, 초기에 알려진 것만큼 큰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니었다.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군대의 손실이 비교적 적었다고 추정한다.[40][41] 많은 부대가 전투에서 살아남아 몇 달 안에 다른 곳에서 전투를 계속했고, 포로로 잡혔던 비잔티움 병사들 대부분은 나중에 석방되었다.[41]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지휘관들(두카스, 타르카네이오테스, 브리엔니오스, 테오도르 알리아테스, 드 바이유, 황제 로마누스 4세)은 살아남아 이후 사건에 참여했다.[42] 이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제국 간의 세력 균형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않았지만, 이후 비잔티움 제국 내부에서 발생한 내전이 셀주크 제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41]

두카스는 피해 없이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돌아가 로마누스 4세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그의 사촌인 미카엘 7세를 황제로 선포했다.[12] 브리엔니오스 또한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일부 병력을 잃었지만, 셀주크 군대는 도망치는 비잔티움 군대를 추격하지 않았고, 만지케르트 자체를 다시 점령하지도 않았다. 비잔티움 군대는 재편성하여 도케이아로 진군했고, 로마누스 4세가 일주일 후 석방되었을 때 그와 합류했다. 가장 심각한 물적 손실은 황제의 사치스러운 수행원이었다.[43]

이 전투의 패배 결과,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 중심지를 상실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비잔티움 제국에 관한 그의 3부작에서 이 패배를 "잔존 세력이 무너지기까지 수 세기가 남았지만, 사실상 사망 선고였다. 아나톨리아의 테마는 제국의 심장과 같았고, 만지케르트 전투 후 수십 년 만에 사라졌다."라고 말한다. 그의 소책자 ''비잔티움의 단편 역사''에서 노리치는 이 전투를 "제국이 7세기 반 동안 존재하는 동안 겪은 가장 큰 재앙"으로 묘사한다.[44] 스티븐 런시먼 경은 그의 "십자군 원정의 역사"에서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재앙이었다. 비잔티움인들 자신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역사가들은 그 끔찍한 날을 되풀이해서 언급한다."라고 썼다.[45]

안나 코무네나는 실제 전투 수십 년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수년, 수십 년 후 만지케르트 전투는 제국에 대한 재앙으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후대의 자료들은 군대 수와 사상자 수를 크게 과장했다.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종종 돌이켜보며 그날의 "재앙"을 애도하며, 그것을 제국의 쇠퇴가 시작된 순간으로 지적했다. 즉각적인 재앙은 아니었지만, 이 패배는 셀주크인들에게 비잔티움인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강탈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전투 후에 이어진 투르크인들의 이동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기 어려웠다.[47]

전투 이후에는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것은 제국을 약화시켰다. 여기에는 왕위를 위한 음모, 로마누스 4세의 운명, 그리고 루셀 드 바이유가 그의 프랑크족, 노르만족, 그리고 독일 용병들을 이끌고 갈라티아에 독립 왕국을 건설하려던 시도가 포함된다.[53] 그는 그를 진압하기 위해 온 황제의 삼촌인 요한 두카스를 물리치고 수도를 향해 진격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해안에 있는 크리소폴리스(위스퀴다르)를 파괴했다. 제국은 마침내 드 바이유를 분쇄하기 위해 셀주크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투르크인들은 그를 그의 아내에게 몸값으로 돌려주었고, 젊은 장군 알렉시오스 콤네누스가 그를 추격한 후에야 그는 붙잡혔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투르크인들이 채운 공백을 만드는 데 상호 작용했다. 그들이 1077년 니카이아(이즈니크)에 수도를 세운 것은 제국의 투쟁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비잔티움과 현대 역사가들은 모두 비잔티움의 운명 쇠퇴를 이 전투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폴 K. 데이비스가 쓴 것처럼, "비잔티움의 패배는 병사들을 위한 주요 모병 장소인 아나톨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함으로써 비잔티움의 힘을 심각하게 제한했다. 그때부터 무슬림들이 그 지역을 통제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비잔티움인들은 다시는 심각한 군사 세력이 되지 못했다." [49] 또한 이것은 후대의 십자군 원정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 1095년의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원래 아나톨리아 상실 후 군사 지원 요청에 대한 서방의 대응이었다.[50] 또 다른 관점에서 서방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비잔티움이 더 이상 동방 기독교의 보호자 역할이나 중동의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신호로 보았다.

5. 4. 문화적 영향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에 장기적인 전략적 재앙을 가져왔지만, 초기 역사가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대규모 학살은 아니었다.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측의 손실이 비교적 적었다고 추정한다.[40][41] 많은 부대가 전투에서 살아남아 몇 달 후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했고, 포로로 잡혔던 비잔티움 병사들 대부분은 나중에 석방되었다.[41]

이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제국 사이의 세력 균형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않았지만, 이후 비잔티움 제국 내에서 발생한 내전은 셀주크 제국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41] 특히, 두카스는 피해 없이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 로마누스 4세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미카일 7세를 황제로 선포했다.[12]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이 패배를 "잔존 세력이 무너지기까지 수 세기가 남았지만, 사실상 사망 선고였다. 아나톨리아의 테마는 제국의 심장과 같았고, 만지케르트 전투 후 수십 년 만에 사라졌다."라고 평가했다. 그의 소책자 ''비잔티움의 단편 역사''에서는 이 전투를 "제국이 7세기 반 동안 존재하는 동안 겪은 가장 큰 재앙"으로 묘사한다.[44] 스티븐 런시먼 경은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재앙이었다."라고 썼다.[45]

안나 코무네나는 전투 후 수십 년 뒤, "로마 제국의 운명은 최저점으로 떨어졌다. 동방의 군대는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투르크인들이 흑해, 헬레스폰토스, 에게해, 시리아 해(지중해), 팜필리아, 실리시아를 휩쓸고 이집트 해(지중해)로 흘러드는 여러 만을 장악하고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했다.[46]

이후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제국의 쇠퇴가 시작된 시점으로 보았으며, 후대의 기록들은 군대 규모와 사상자 수를 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패배는 셀주크인들에게 비잔티움인들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강탈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47]

전투 이후, 왕위 찬탈 시도, 로마누스 4세의 불행한 운명, 루셀 드 바이유의 독립 왕국 건설 시도 등 일련의 사건들이 제국을 약화시켰다.[53] 이러한 사건들은 투르크인들이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며, 1077년 룸 셀주크 왕조가 니케아(이즈니크)에 수도를 세운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폴 K. 데이비스는 "비잔티움의 패배는 병사들을 위한 주요 모병 장소인 아나톨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함으로써 비잔티움의 힘을 심각하게 제한했다."라고 평가했다.[49] 또한 만지케르트 전투는 십자군 원정의 근본 원인 중 하나로 해석되는데, 1095년 제1차 십자군 원정은 아나톨리아 상실 후 비잔티움 황제의 군사적 지원 요청에 대한 서방의 대응이었다.[50] 서방은 만지케르트 전투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이 더 이상 동방 교회와 중동의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쇠락에 있어 만지케르트 전투와 비교되는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52] 두 전투 모두 비대한 비잔티움 군대가 셀주크 군대의 매복에 당해 패배했지만,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권력을 유지한 덕분에 미리오케팔론 전투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반면, 로마누스 4세의 경우에는 그의 적들이 "용감하고 올바른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제국은...회복되지 못했다."[53]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노르만 병사들은 패배에 대한 이야기를 퍼뜨렸고, 이는 롤랑의 노래의 한 에피소드에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4]

터키 이스탄불의 잠리자 모스크는 높이 107.1m의 4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를 가리킨다.[55] 2018년 터키 집권당은 2023년, 2053년, 2071년 목표를 발표했는데, 각각 공화국 100주년, 이스탄불 함락 600주년, 만지케르트 전투 10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었다.[56]

6. 역사적 평가 및 논쟁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록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대참사로 여겨졌지만,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잃은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평가한다.[95] 이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제국 간의 세력 균형을 직접적으로 바꾸지는 않았지만, 그 후 비잔티움 제국 내부에서 발생한 내전이 셀주크 제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41]

황제에게 있어서 전투로 일어난 재난은, 간단히 말해 아나톨리아 중심부의 상실이었다. 존 율리우스 노리치는 그의 비잔티움 제국에 관한 3부작에서 이 패배는 "치명타"였으며, "아나톨리아의 군관구는 문자 그대로 제국의 심장이며 만지케르트 이후 수십 년 후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졌다."라고 묘사했다.

당대 비잔티움 역사가 안나 콤네나는 전투가 일어난 수십 년 후 기록하길, "로마 제국의 운은 그들의 최저점으로 가라앉았다."라고 하였다.[97]

몇 해가 지나고 십 년이 지나면서 만지케르트는 제국의 재난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후세의 기록들은 군대의 규모와 부상병의 수를 과장했다.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가끔 이날의 재난을 회상하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전투는 제국이 다시 마주치게 된 재난의 정확한 지점이었지만, 즉각적인 재난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셀주크 족에게 비잔티움이 정복 불가능한 천년 된 로마 제국(비잔티움과 셀주크 모두 비잔티움을 여전히 이같은 명칭으로 불렀다.)으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전투를 첫 고리로 하여 촉발된 전투 이후의 연쇄적 사건들은 몇 년 후 제국의 발밑을 위태롭게 하였다. 결국 전에 일어났던 황제에 대한 음모와 찬탈은, 로마누스의 운명 자체로도 끔찍했지만 정국을 불안정하게 하고 수세기 동안의 혼란을 유발했다.

후대의 비잔티움과 당대의 역사가들은 이 전투로 비잔티움 제국의 운이 쇠락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이견이 없게 되었다. 이는 후세의 십자군 운동의 원인으로 해석되었는데, 1095년의 제1차 십자군아나톨리아의 패배 이후 비잔티움 황제의 서방에 대한 군사적 지원요청으로 인해 시작되었다.[99] 다른 시각으로 보면 서방은 만지케르트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을 더 이상 동방 교회와 중동의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보호자로 보지 않게 된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대한 '쇠락'의 지점으로서 흔히 만지케르트 전투와 비교된다. 두 전투는 백 년이 넘는 간격을 두고 벌어진 사건이지만, 비대한 비잔티움 군이 좀 더 찾기 힘든 셀주크인 적들의 매복에 당해 패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힘을 유지한 덕분에 처음부터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로마누스에게는 똑같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적은 "용감하고 올바른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으며", 이 결과 "제국은...회복되지 못했다."[100]

6. 1. 전투의 중요성에 대한 논쟁

만지케르트 전투가 비잔티움 제국의 몰락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오랫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대참사로 여겨졌지만,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이 잃은 것이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평가한다.[95] 많은 부대가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몇 달 후 다른 곳에서 계속 싸웠다. 비잔티움 제국의 모든 사령관들(두카스, 타르카네이오테스, 브리엔니오스, 테오도르 알리아테스, 루셀 드 바유, 그리고 황제)은 살아남아 후속 사건에 참여했다.[96]

두카스는 피해 없이 탈출하여 콘스탄티노플로 급히 가서 로마누스 4세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켜 미카엘 7세를 황제로 선포했다.[85] 브리엔니오스 또한 부대 퇴각 중 약간의 병력을 잃었다. 셀주크 군대는 비잔티움 군대를 추격하지 않았고, 만지케르트를 탈환하지도 않았다. 비잔티움 군대는 재집결하여 도케이아로 진군했고, 일주일 후 풀려난 로마누스 4세와 재회했다. 가장 심각한 손실은 황제의 값비싼 화물 마차였다.

존 율리우스 노리치는 이 패배가 "치명타"였으며, "아나톨리아의 군관구는 문자 그대로 제국의 심장이며 만지케르트 이후 수십 년 후 그것들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묘사했다.[98] 안나 콤네나는 "로마 제국의 운은 최저점으로 가라앉았다. 동방의 군대는 모든 방향으로 흩어졌는데, 왜냐하면 투르크군이 흑해, 헬레스폰트, 에게해, 시리아 해(지중해), 그리고 다양한 만 같은 그 중에서도 팜필리아, 실리시아,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비워놓아 밀려났던 이집트 해(지중해) 등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라고 기록했다.[97]

만지케르트 전투는 제국의 재난으로 여겨졌고, 후세의 기록들은 군대 규모와 부상병의 수를 과장했다. 비잔티움 역사가들은 이날의 재난을 회상하고 한탄했다. 이 전투는 제국이 또다시 마주치게 된 재난의 정확한 지점이었지만, 즉각적인 재난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셀주크 군대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이길 수 없고, 정복할 수 없는, 천년 된 로마 제국(비잔티움과 셀주크 모두 비잔티움을 여전히 이같은 명칭으로 불렀다.)으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찬탈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고, 전투 이후에 이어진 투르크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게 하였다. 결국 이로 인해 10년간 소아시아 전역은 완전히 점령당했다.[98] 결국 전에 일어났던 황제에 대한 음모와 찬탈은, 로마누스의 운명 자체로도 끔찍했지만 정국을 불안정하게 하고 수세기 동안의 혼란을 유발했다.

전투를 첫 고리로 하여 촉발된 전투 이후의 연쇄적 사건들은 몇 년 후 제국의 발밑을 위태롭게 하였다. 이 사건들에는 왕권 찬탈 시도들과 로마누스의 불행한 운명, 루셀 드 바유가 휘하 3,000명의 프랑크족, 노르만족 용병들과 함께 갈라티아에서 독립된 왕국을 세우려고 시도했던 것이 포함된다.[100] 그는 자신을 압박하던 황제의 삼촌 요한 두카스를 패퇴시키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아시아 해안에 있는 크리소폴리스(위스퀴다르)를 파괴하며 수도로 진군했다. 제국은 결국 루셀 드 바유를 격퇴하기 위해 셀주크에 손을 벌렸고 셀주크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투르크인들은 젊은 장군 알렉시오스 1세가 루셀 드 바유를 체포하기 위해 그를 추적하자, 몸값을 받고 그를 아내에게 돌려보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서로 상호작용해 힘의 공백을 만들었고, 이는 투르크가 채우게 된다. 셀주크 인들이 1077년 그들의 수도를 니케아(이즈니크)에 세우기로 한 선택은 제국의 고난이 새로운 기회를 줄 수 있는지를 보려는 욕구로 설명할 수 있다.

후대의 비잔티움과 당대의 역사가들은 이 전투로 비잔티움 제국의 운이 쇠락되었다고 기록하는데 이견이 없게 되었다. 이는 후세의 십자군 운동의 원인으로 해석되었는데, 1095년의 제1차 십자군아나톨리아의 패배 이후 비잔티움 황제의 서방에 대한 군사적 지원요청으로 인해 시작되었다.[99] 다른 시각으로 보면 서방은 만지케르트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을 더 이상 동방 교회와 중동의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보호자로 보지 않게 된 상징으로 여기기도 했다.

델브룩(Delbruck)은 이 전투의 중요성이 과장되었다고 여기지만, 이 전투의 결과로 제국은 향후 수 년 동안 전장에 효율적인 군대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미리오케팔론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대한 '쇠락'의 지점으로서 흔히 만지케르트 전투와 비교된다. 두 전투는 백 년이 넘는 간격을 두고 벌어진 사건이지만, 비대한 비잔티움군이 좀 더 찾기 힘든 셀주크인 적들의 매복에 당해 패한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누엘 1세가 힘을 유지한 덕분에 처음부터 극히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같은 일이 로마누스에게는 똑같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의 적은 "용감하고 올바른 사람을 순교자로 만들었으며", 이 결과 "제국은...회복되지 못했다."[100]

6. 2. 비잔티움 제국의 패배 원인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초기 역사가들의 주장처럼 완전한 궤멸은 아니었다. 현대 학자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손실이 비교적 적었다고 평가한다.[40][41] 많은 부대가 전투에서 살아남아 다른 곳에서 계속 싸웠고, 포로로 잡혔던 비잔티움 병사들 대부분은 나중에 풀려났다.[41] 지휘관들 역시 대부분 살아남아 이후 사건에 참여했다.[42]

하지만 이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아나톨리아 중심부 상실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존 줄리어스 노리치는 이 패배를 "비잔티움 제국의 사망 선고"라고 표현하며, 아나톨리아가 제국의 심장과 같았다고 강조했다.[44] 스티븐 런시먼 역시 이 전투를 비잔티움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재앙이라고 평가했다.[45]

안나 콤네나는 이 전투로 인해 제국의 운명이 최저점으로 떨어졌고, 투르크인들이 흑해와 지중해 연안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고 기록했다.[46]

이 패배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비잔티움 제국이 무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후 투르크인들의 소아시아 침입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47] 또한, 로마누스 4세의 비참한 운명은 제국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48]

루셀 드 바이유의 반란 시도 등 전투 이후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제국의 약화를 더욱 심화시켰다.[53] 이러한 혼란 속에서 셀주크 투르크는 니케아(이즈니크)를 수도로 삼아 세력을 확장했다.

결론적으로, 만지케르트 전투는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폴 K. 데이비스는 이 전투로 인해 비잔티움 제국이 아나톨리아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군사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평가했다.[49] 또한, 이 전투는 십자군 원정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로 해석되기도 한다.[50]

미리오케팔론 전투 역시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에 중요한 사건으로 비교되지만, 마누엘 1세 콤네누스가 권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그 영향은 제한적이었다.[52] 반면, 로마누스 4세의 패배는 제국의 회복 불가능한 쇠퇴로 이어졌다.[53]

참조

[1] 서적 Catalogue of Byzantine Seals at Dumbarton Oaks and in the Fogg Museum of Art N.p.
[2] 서적 From Dynastic Principality to Imperial District
[3] 서적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University Press
[4]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University Press
[5] 논문
[6] 웹사이트 Battle of Manzikert: Military Disaster or Political Failure? https://deremilitari[...]
[7] 논문
[8] 논문
[9] 논문
[10]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slam
[11] 서적 The Crusader States Yale University Press
[12]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13] 서적 The Crusades
[14] 서적 The Crusades Mercury Books
[15]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16] 백과사전 Anni
[17] 서적 Manzikerk 1071. The Breaking of Byzantium Bloomsbury USA
[18] 서적 Byzantine Imperial Guardsmen 925–1025. The Taghmata and Imperial Guard Bloomsbury USA
[19] 서적 Byzantine Armies 886–1118 Bloomsbury USA
[20] 서적 The Byzantine Wars
[21] 서적 Byzantine Armies 886–1118 Bloomsbury USA
[22] 논문 Büyük Selçuklular Ve Nizamül-Mülk, Süleyman Demirel Üniversitesi, Sosyal Bilimler Enstitüsü, (Yüksek Lisans Tezi), Isparta 2019,(Great Seljuks and Nizamal-Mulk) https://www.academia[...] 2019-01-01
[23] 논문
[24] 웹사이트 Hınıs'ın tarihçesi http://www.hinis.gov[...] 2023-09-29
[25] 서적 Middle East Conflicts from Ancient Egypt to the 21st Century: An Encyclopedia and Document Collection ABC-CLIO
[26] 논문
[27] 서적 Byzantium: The Apogee
[28] 서적 The Crusades Mercury Books
[29]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30]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31] 서적 Manzikerk 1071. The Breaking of Byzantium Bloomsbury USA
[32] 서적 Battle a Visual Journey Through 5000 Years of Combat Dorling Kindersley
[33] 서적 Byzantine Armies, 886–1118 https://books.google[...] Osprey
[34] 서적 Manzikert 1071: The breaking of Byzantium Osprey Publishing
[35]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36] 서적 (제목 없음)
[37] 뉴스 Alp Arslan, the lion of Manzikert https://www.arabnews[...] 2015-06-19
[38] 서적 (제목 없음)
[39] 서적 Manzikerk 1071. The Breaking of Byzantium Bloomsbury USA
[40] 서적 Byzantium at War 600–1453 Osprey
[41] 서적 Conflict and Conquest in the Islamic World: A Historical Encyclopedia ABC-CLIO
[42]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43] 서적 Manzikerk 1071. The Breaking of Byzantium Bloomsbury USA
[44]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45] 서적 A History of the Crusades Vol. I. The First Crusade and the Foundation of the Kingdom of Jerusalem
[46] 웹사이트 Medieval Sourcebook: Anna Comnena: The Alexiad: Book I http://www.fordham.e[...] 2008-08-26
[47] 서적 Byzantium at War AD 600 – 1453 Bloomsbury USA
[48] 서적 Manzikerk 1071. The Breaking of Byzantium Bloomsbury USA
[49] 서적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 World's Major Battles and How They Shape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50] 서적 Crusades The Illustrated History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51] 백과사전 7. Kapitel: Byzanz http://www.zeno.org/[...] Walter de Gruyter 2012-04-22
[52] 서적 The Decline of Medieval Hellenism in Asia Minor: and the process of Islamization from the eleventh through the fifteenth century University of California
[53]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54] 학술지 The Generation of the Episode of Baligant: Charlemagne's Dream and the Normans at Mantzikert https://www.jstor.or[...] 1976
[55] 뉴스 Turkey's largest mosque opens its doors in Istanbul https://www.gulf-tim[...] 2019-03-08
[56] 웹사이트 Türkiye'nin 2023, 2053 Ve 2071 Hedefleri {{!}} YeniBirlik Gazetesi https://www.gazetebi[...] 2019-09-03
[57] 서적 Crusade of Kings Wildside Press LLC
[58] 웹사이트 Age of Empires II: Definitive Edition – recenzja https://gry.interia.[...] 2019-12-04
[59] 서적 (제목 없음)
[60] 웹사이트 Battle of Manzikert: Military Disaster or Political Failure? https://web.archive.[...] 2008-08-26
[61] 문서 Մանազկերտ
[62]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63] 서적 The Crusades
[64] 서적 The Crusades Mercury Books
[65]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66]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67] 서적 (제목 없음)
[68] 서적 The Crusades Mercury Books
[69]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70] 서적 Battle a Visual Journey Through 5000 Years of Combat Dorling Kindersley
[71]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72] 서적 Crusade of Kings Wildside Press LLC
[73] 서적 The English cyclopædia Bradbury & Evans
[74] 서적 Byzantium at War 600‐1453 Osprey
[75] 서적 Conflict and Conquest in the Islamic World: A Historical Encyclopedia ABC-CLIO
[76]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77] 웹사이트 Medieval Sourcebook: Anna Comnena: The Alexiad: Book I http://www.fordham.e[...] 2008-08-26
[78]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79] 서적 100 Decisive Battles from Ancient Times to the Present: The World's Major Battles and How They Shaped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80] 서적 Crusades The Illustrated History University of Michigan P
[81] 백과사전 7. Kapitel: Byzanz http://www.zeno.org/[...] Walter de Gruyter 2012-04-22
[82]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83] 웹인용 The Battle of Manzikert http://www.deremilit[...] 2008-08-26
[84]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slam http://books.google.[...]
[85]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86] 서적 The Crusades Mercury Books
[87]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88]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89]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90] 서적 The Crusades Mercury Books
[91]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92] 서적 Battle a Visual Journey Through 5000 Years of Combat Dorling Kindersley
[93]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94]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95] 서적 Byzantium at War 600–1453 Osprey
[96]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97] 웹인용 Medieval Sourcebook: Anna Comnena: The Alexiad: Book I http://www.fordham.e[...] 2008-08-26
[98]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99] 서적 Crusades The Illustrated History University of Michiga P
[100] 서적 A Short History of Byzantium Vintage Book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